Love me, Right?
w. 김 햅비 (@chan040504)
낡고 헌 문집에 쓰인 달았던 문장을 기억한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혀 끝에 미미하게 감돌던, 각설탕에서 떼어져 나온 작은 조각과도 같은 글자가 오래도록 가슴 한 구석에 남았다.
책갈피를 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도 이내 알게 모를 부끄러움에 대신 꼭꼭 씹어 삼켰었다.
니시나 카즈키라는 사람을 처음 보았던 날의 감상이다.
벽돌색이 빛바래 허옇게 뜬 거칠거칠한 표면이 건물의 둘레를 빙 감싸고 있었다. 오래된 만큼의 유명세를 거하게 탔다고, 대학교의 도서관은 그만큼의 위용이 남달랐다. 파르테논 신전을 본 따서 네 기둥을 세우고 적벽이 그를 휘감았다. 군데군데 정돈되지 못한 덩굴 때문인지 건물은 좀 더 옛 것의 버려진 신전 같은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붕 뜬 마음이었다. 갓 성인이 되어 겨우
앳된 티를 벗어냈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소망을 품은 청년이었으며, 대학생의 길다고 한다면 긴 시간동안의 자잘한 이벤트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허나 현실은 종이 향이 코끝을 잔뜩 절여놓고 마는 도서관의 지박령과 같은 신세였다. 산더미 같은 과제에 파묻혀 전공도서를 파헤치며 노트북에 글자를 두드리고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떠한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도서관의 한숨소리만큼은 모두가 용서할 수 있는 작은 배려와 같은 것이었다.
코우가미 타이가는 절망하였다. 새로운 인연이 닿아 한껏 피어낼 젊음의 청춘을 벌써 3분의 1가량씩이나 책 더미에 허비하였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등록비를 대주며 저를 응원하고 있을 가족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져버릴 수 없는 욕심이 들끓어서라도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는 없는 현실에 비탄하며.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될 작은 이벤트는 곧 다가올 운동회를 겸한 규모가 작은 소축제였다.
엄연히 축제라고 꽤 많은 부스를 신청 받았으며 기간이 중간고사와 가깝다는 것을 빼놓고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몇 페이지마다 작게 접힌 노트 몇 권을 수시로 돌려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타이가는 허공에 손을 뻗어 책의 모서리를 더듬거렸다. 제일 자주 손을 대었던 전공도서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끝이 조금 움푹하게 둥근 것이 특징이라서 굳이 제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음에 의아하여, 노트북에 고정한 시선을 돌리니 정신이 없다고 빼놓고 온 모양이었다.
신전에 대놓고 비유를 할 정도로 크기에는 자신이 있던 도서관의 장점은 거대한 홀에 위치한 3층 가량의 도서가 빼곡한 책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10군데의 방이 연결되어 있어 일반인의 출입을 허가하는 곳과 학생들만이 이용하는 도서실과 같은 형태의 방이 따로 구분 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캔 커피나 카페인 음료의 빨대를 주구장창 입에 단 채로, 세를 내놓지 않아도 되는 방의 책상에 못 박혔으며 불행하게도 타이가도 이에 속하였다.
그나마 축제라면 환장하는 이 청년이 숨 막히는 과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가 축제의 환경이 보장되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천막이 세워지는 것이 얼굴이 달뜨고 슬로건이 걸리는 것에 두 눈이 고정되는 두근거림이 엄연히 존재하는 기간을 말하였다.
K열 책장의 5번째 칸의 4번째 줄, 어떠한 이론의 원리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궁서체를 쓰다듬으며 내내 다른 도서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겨우 들었다. 갑작스레 움직인 근육에 담이 걸렸다.
“아….”
급격히 몰려오는 고통에 찌푸릴 대로 찌푸린 인상으로 목뼈를 맞추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던 주변에는 완연한 고요만이 내려앉았다. 침침하기까지 한 눈을 껌뻑이며 앞을 내다보았다.
‘그 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적당한 바람이 머릿결 사이를 어지럽히고 풀잎의 싱그러움이나 손가락에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의 색감이 뚜렷하게 보이던 때에 단번에 모든 구름이 걷히듯 태양빛이
내려준 것만 같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자 미상의 소설 한 구절, 강제로 다른 생각을 밀어낸 한 문단의 글자는 한 순간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의 첫 문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옆 칸의 책장 높은 곳에서부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그 문장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떠한 이론의 원리는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다른 손에
들려있던 책마저 곤두박질치려고 할 때쯤 산뜻하게 올려 세운 회색 머리를 한 청년이 다가왔다.
“책 떨어졌어요.”
지문 채취를 하자면 제 지문이 가장 진하게 남을 것이 분명한, 늘 원망스럽기만 하던 도서가 생애 처음 사랑스럽게 보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상대방을 바라보면 고양이 입매가 되는 이목구비가 저렇게도 사랑스러웠나. 코우가미 타이가는 그렇지 않아도 원초적인 생각과 행동밖에는 행할 수 없었다. 과제에 정신을 빼앗기고 불규칙적인 생활리듬에 언제든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축제에 함께 가주세요.”
“응?”
“어?”
어떠한 이론의 원리가 다시 한 번 바닥에 뒹군다. 책 대신에 작지만 다부진 손을 움켜쥐고 타이가는 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성적인 데이트 신청을 건넸다. 영화를 보자는 말도 놀이동산에 가자는 것도 아닌 학교의 소규모 축제에서 함께 해달라는 의미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단박에 잡히며 조금 더 선명하게 그 사람의 얼굴이 들어섰다. 굉장히 호감형으로 잘생긴 얼굴, 오목조목 따져보면 그냥 제 스타일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년은 고맙게도 처음 본 사람의 이상한 헛소리에도 마주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타이가를 들여다보았다.
“어? 잘생긴 신입? 분명히 이름이…, 코우가미 타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카즈키의 주변은 언제나 남녀 할 것 없이 북적였는데 요즘 들려오는 화젯거리는 1학년의 신입생 중,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는 정보였다. 그 얼굴을 한 번
보겠다며 너도나도 타이가를 찾아 나섰으나 수업시간이 아니고서야 집과 도서관을 반복주행하며
마스크와 모자로 단단히 얼굴을 차단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었다.
조금 다크써클이 내려앉았으나 나이 대에 맞게 뽀송뽀송한 피부와 내려간 눈꼬리, 신록이 들어선 눈과 마주하자 누군가를 평하지 않는 카즈키는 그저 잘생겼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신입생이 축제를 한껏 즐길 수 있도록 제가 힘쓰겠다며 카즈키의 흔적은 이내 타이가의 휴대폰 속이 고이 남았다. 매끄러운 액정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마음 속 찻잔에 여유롭게 따르던 찻물이 금세 파도가 되어 흘러 넘쳐 흥건하게 바닥이 젖어버리자 마찬가지로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던 카펫이나 의자의 다리 따위가 봉변을 당했다. 속이 온통 엉망진창이다. 주체하지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였다.
이제는 연필심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도,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간혹 들려오는 한숨소리마저도 무음과 같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시끄러워 누군가 직접 망치를 들고 와 뒤통수를 때리는 것처럼 이골이 울렸다. 린넨을 걸친 큐피트의 작은 화살이 어느 청년의 가슴을 정확히 맞추고 지나갔던 날이다.
시곗바늘이 넘어가는 소리에 맞추어 눈을 굴리다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만다행으로 시험공부와 더불어 과제가 집중이 되지 않자 타이가는 축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다. 태양과 마주하는 자리에 서고 싶다고, 세뇌를 시키는 수준으로 되 내였다. 책상에 올라간 종이뭉치는 불어날 대로 불어났으며 찻물을 받던 찻잔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린 지 오래였다.
1시간이 넘도록 옷가지와 신발, 악세사리를 고르며 누가 보면 마치 상견례 자리에라도 나가는 듯 설레발을 치며 타이가는 신발 뒤꿈치에 둘째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땅이 중력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듯이 서서히 뉴턴의 법칙처럼 이끌리는 몸뚱이가 제어가 되지 않아 휘청이며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 길가의 번듯한 간판에서 전공도서가 떠오르고 건물은 금세 책장이 되어 지난날의 카즈키와 조우하였던 날을 기억해 보았다. 목적지에 다다른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인생의 기쁨일까.
소규모답지 않게 체계가 잡힌 축제는 성황이었다. 어느 부스에나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행사를 준비하는 청년들의 어수선함이 어우러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타이가는 카즈키를 만났다.
“선배”
피골이 상접했던 도서관의 모습은 잊어주세요. 미적대며 다가오는 타이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카즈키는 오늘도 잘생겼다는 한마디와 함께 웃어주었다. 아, 오늘도 눈이 부신다.
잔뜩 기대를 품고 왔던 타이가의 벽은 무너져 내렸다. 소문의 후배를 데리고 다니는 학교의 유명인 덕택에 인파에 치이기를 반복하였으며 둘만의 축제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청년은 너무도 작은 사회생활을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어찌나 긴장을 하였으면 도서관으로 피신하고 싶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수십 번도 더 한 인사를 매번 처음처럼 건네는 타이가는 제 손을 잡은 카즈키의 손을 내려다보며 안도감을 찾았다.
축제의 자랑거리인 거울미로 앞에 다다라 내부를 헤매는 동안에도 벽면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고 싶은 마음에 옷자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지만 흘긋 제 이름을 부르며 뒤돌아보면 서둘러 거두어 버렸다. 출구에서부터 빛이 새어나왔다. 둘 만의 시간도 끝이 났다.
“생일 축하해, 카즈키!”
아쉬움이 진득히 묻어나는 길을 되돌아 밟고 싶었으나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케이크와 선물상자를 여럿 들고 선 카즈키의 동기들이 폭죽에서 나온 부산물을 뒤집어 쓴 청년의 얼굴에 케이크를 듬뿍 발랐다. 때는 초여름의 푸른 잎이 돋아나는 계절이자 카즈키의 생일인 5월 5일이었다. 눈을 끔뻑이며 동상처럼 굳어진 타이가를 돌아보며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벽화의 한 장면 같아서, 멍하게 감상하는 것도 잠시 오늘이 카즈키의 생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 검은 머리 청년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축제가 끝나고 두 팔 가득 선물을 들어 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카즈키는 기운이 없어 보이는 타이가가 신경이 쓰여 힐긋거리며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혹여 무얼 잘못 먹었나, 축제가 재미가 없던 것인가 눈치 채지 못한 답답함이 채 흘러나오기도 전에 어느 건물 앞에서 우뚝 멈춰선 타이가가 뒤를 돌았다.
“저는 오늘 생일이신 줄도 모르고….”
“괜찮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걸.”
축제를 같이 즐겨준 것만으로도 선물이라며 예의 그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카즈키의 볼에 남은 크림자국이 눈에 밟혔다. 부풀어 오르던 불만감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던 타이가는 옆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당황한 카즈키가 몸을 돌리다 쇼핑백을 떨어뜨렸고 속에 들은 물건을 줍는 사이 꽃향기가 가까이서 맴돌았다. 색깔별로 맞춘 장미다발을 든 타이가가 고백이라도 하는 소년이라도 된 양 제 쪽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꽃만 내민 채로 그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일로 기쁘다. 타이가.”
장미의 색을 모두 섞어 버린다면 무슨 색이 나올까, 현재 떠오르는 마음의 색을 정의할 수 없어 땅에서 피는 꽃의 도움이라도 바랄까 하였더니 마주친 두 눈에 꽂혀버린 문장이 있었다.
‘세상 모든 꽃이 태양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없지요, 순리에 따르는 것이에요. 태어남에 있어 삶을 좌우하는 것에 몸을 맡기고 이끌리게 되어요. 하물며 그것이 인간이라면, 사랑이 아니고서야 무엇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나요?’
사랑이라고 하였다. 제 찻잔을 깨트린 범인도 같은 녀석이었다.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어 향을 맡은 카즈키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타이가는 제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와 조우하였다. 도서관의 작은 방주인이 종이 너머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네 생일도 꼭 챙겨줄게, 언제야?”
“어제였습니다.”
흔들리는 동공이 제자리를 찾지를 못한다. 허둥지둥 어느새 제 몸 만하게 불어난 짐을 이고 당황하는 모양새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꼬리를 접어 웃는 타이가를 이번에는 꽃을 든 청년이 멍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웃는 것을 처음 보아서일수도 있었고 훗날의 봄바람이 미리 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갖고 싶은 게 있어? 아니면 다른 거라도….”
각설탕을 감싼 종이의 겉껍질을 벗겨내었다.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차에 빠뜨리자 점차 크기가 작아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춘다. 스며든 단 맛이 퍼지면 단숨에 들이키고는,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젊은 날의 치기를 내세우며 타이가는 마지막 종잇장에 짙게 남은 잉크 자욱의 말을 되새겼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Love me, right?